전국체전 15연패·챔피언의 요람, 부여에서 한국 복싱의 역사를 쓰다
충남 부여. 백제의 고도이자 인구 5만 7천명 남짓의 작은 읍 단위 지역. 이 조용한 농촌 마을에서 한국 복싱사를 새로 쓴 인물이 있다.
‘독학 지도자’, ‘농군 복서’, ‘부여의 복싱 대부’로 불리는 임영수 관장(79세, 금성복싱체육관)이다.
| ‘독학 지도자’, ‘농군 복서’, ‘부여의 복싱 대부’로 불리는 금성복싱체육관 임영수 관장 |
체육관 하나 없던 시절, 스스로 책 한 권으로 복싱을 배웠고, 그 열정 하나로 수십 명의 전국 챔피언과 국가대표를 길러냈다. 그의 손끝에서 탄생한 부여 복싱은 김동회 선수가 전국체전 15연패의 신화의 대기록을 달성하며 ‘대한민국 복싱의 심장’이라 불릴 만큼 위대한 족적을 남겼다. 또한 임영수 관장은 김동회 선수가 앞으로 2년더 선수생활을 하며, 김태현 역도선수의 전국체전 16연패 기록을 깨는 것을 지켜보기 위해 팔순까지 끊임없이 도전을 거듭하겠다는 의욕을 보였다.
복싱의 첫걸음, 밥그릇 한 세트에서 시작되다
임영수 관장의 복싱 입문은 영화보다 더 극적이다. 복싱을 배우고 싶었지만, 당시 부여에는 체육관이 단 한 곳도 없었다. 결국 복싱을 잠시 배운 적 있다는 한 사람을 찾아가 사정 끝에 스승으로 모셨다.
그는 결혼을 앞둔 스승에게 회비 대신 스테인리스 밥그릇과 수저 한 세트를 건넸고, 단 일주일간의 스텝 훈련을 배운 것이 그의 복싱 인생의 전부였다. 이후 스승은 홀연히 떠났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임영수 관장은 서점에서 정영수 저자의 복싱 교본을 구입해 그림과 설명만으로 기술을 익히며 완전한 독학의 길로 들어섰다. 그는 매일 새벽 부소산성 인근 ‘삼충사’ 앞뜰에서 복싱을 연습했고, 곧 친구와 후배 10여 명을 모아 자신이 ‘스승’이 되어 지도를 시작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처마 밑에서, 붕대 대신 아기 기저귀를 찢어 손에 감고, 미군부대에서 버려진 글러브를 꿰매며 훈련을 이어갔다. 그의 청춘은 화려하지 않았지만, ‘하면 된다’는 신념 하나로 불가능을 현실로 바꿨다.
전쟁터에서도 이어진 복싱의 열정
1970년, 임영수 관장은 백마부대 일원으로 월남전에 파병됐다. 포화 속에서도 그의 머릿속은 오직 복싱이었다. “보병은 잽이고, 곡사포는 훅이고, 직사포는 스트레이트였다.” 그에게 복싱은 단순한 스포츠가 아닌 삶의 철학이었다. 생과 사의 경계에서도 기술을 연구하던 그는 전쟁 후에도 복싱을 포기하지 않았고, 1987년 마침내 부여 금성복싱체육관을 설립했다.
전국체전 15연패 신화를 낳은 ‘부여의 챔피언 공장’
임영수 관장의 손끝에서 자라난 선수들은 곧 전국을 제패하기 시작했다. 1987년 이광운 선수가 부여 복싱의 첫 전국체전 금메달을 따낸 것을 시작으로 이후 수많은 챔피언들이 금성복싱체육관에서 배출됐다.
그중에서도 김동회(보령시청) 선수는 전국체전 15연패라는 대한민국 복싱 역사상 전무후무한 대기록을 세우며 ‘살아 있는 전설’로 불리고 있다.
김동회 선수가 2022년 103회 전국체육대회 라이트급 결승에서 금메달을 획득하고 스승 임영수 관장과 함께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임영수 관장의 막내아들 임성훈 선수는 복싱 특기생으로 용인대에 진학해 현재 스포츠 행정가로 활동 중이며, 전청소년 대표 김택민, 전 유소년대표 조경태 선수 등도 그의 제자들이다.
특히 1990년과 1991년 단 2년간 전국체전 금메달 7개를 석권하며 ‘부여 복싱 신화’가 완성됐다. 작은 읍 단위 체육관이 전국 챔피언을 쏟아낸 이 기록은 한국 복싱사에 지금도 회자되는 전설이다.
| “선수를 가르치는 건 기술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라며 지금도 어린 복서들을 길러내고 있다. |
“선수를 가르치는 건 기술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임영수 관장은 기술보다 ‘사람’을 먼저 본다. 그의 지도 방식은 철저히 맞춤형이다. 선수의 체격, 습관, 성격, 성장 환경을 모두 고려해 그에 맞는 기술과 전략을 세운다. “트레이너는 선수의 인생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야 진짜 챔피언을 만들 수 있죠.”
그의 헌신은 지도자 그 이상의 것이다. 전국대회에 나가면 제자들은 숙소에서 재웠지만, 본인은 늘 봉고차 안에서 쪽잠을 청했다. 그런 스승의 땀과 눈물을 기억하는 제자들은 태릉선수촌 대신 고향 부여로 내려와 스승 곁에서 훈련을 이어갔다.
61년 복싱 인생의 상징 — 금성복싱체육관
현재 부여읍 성왕로 161번길 9에 자리한 금성복싱체육관은 2024년 ‘부여 복싱 60주년 기념패’를 걸며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기념패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1964년 4월 10일 새벽 6시, 부소산 삼충사에서 시작된 부여 복싱의 첫 걸음.
1987년 6월 6일 금성복싱체육관 개관과 함께 60년간 이어온 부여 복싱 역사를 기리며
임영수 관장님께 존경과 감사를 전합니다.”
체육관 내부는 61년 전의 그 모습 그대로다. 벽면에는 임영수 관장의 좌우명인 ‘하면 된다’가 걸려 있고, 곳곳에는 수많은 글러브와 링의 흔적이 세월의 무게를 말해준다. 이곳은 단순한 체육관이 아닌, 부여 복싱의 역사이자 수많은 젊은이들의 땀과 꿈이 서린 성지다.
| 체육관 입구에 걸려 있는 60주년 기념패 |

벽면에는 임영수 관장의 좌우명인 ‘하면 된다’가 걸려 있

금성복싱체육관의 4각 링은 61년 세월의 땀과 열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낡은 로프와 닳은 매트, 그리고 정면 아래에 걸린 글귀 “하면 된다. 안 되면 되게 하라.”
이 문장은 임영수 관장이 반세기 동안 가슴에 새기며 선수들에게 전해온 삶의 철학이자 복싱 정신 그 자체다.

61년을 지키며 수많은 선수를 키워낸 금성복싱체육관 내부모습
낡은 로프와 닳은 매트, 그리고 정면 아래에 걸린 글귀 “하면 된다. 안 되면 되게 하라.”
이 문장은 임영수 관장이 반세기 동안 가슴에 새기며 선수들에게 전해온 삶의 철학이자 복싱 정신 그 자체다.
현재도 ‘진행형 신화’ — 전국에서 몰려드는 제자들
지금도 전국 각지의 복서들이 임영수 관장을 찾아 부여로 온다. 그의 세밀한 기술 지도와 정신력 중심의 코칭은 젊은 선수들에게 여전히 교본이 되고 있다.
특히 부여 출신으로 전국체전 4연패를 달성 중인 성남시청 소속 김택민 선수는 지금도 틈날 때마다 스승을 찾아 금성체육관에서 훈련을 이어가고 있다.
또한 부여중학교 3학년 김원호 선수는 오는 11월 유소년 국가대표 선발전에 출전할 예정으로, 부여 복싱의 미래를 이끌 차세대 기대주로 주목받고 있다.
임영수 관장은 여전히 “좋은 선수들이 화수분처럼 끊임없이 자라나는 것이 가장 큰 보람”이라며 후진 양성에 여념이 없다.
| 부여 출신으로 전국체전 4연패를 달성 중인 성남시청 소속 김택민 선수 |
| 오는 11월 유소년 국가대표 선발전에 출전할 예정인 부여중학교 3학년 김원호 선수 |
“마지막 꿈, 부여 실업팀을 만드는 것”
임영수 관장은 평생의 마지막 목표로 “고향 부여에 복싱 실업팀을 만드는 것”을 꼽는다. 그동안 길러낸 선수들이 전국 각지로 흩어지지 않고 고향에서 운동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고 싶다는 것이다.
“내가 길러낸 선수들이 부여에서 운동하며 후배들을 이끌어주는 그날이 오면, 내 복싱 인생은 비로소 완성되는 겁니다.”
흙 속에서 피어난 챔피언, 끝나지 않은 도전
칠순을 훌쩍 넘긴 지금도 임영수 관장은 새벽 5시면 자전거를 타고 부소산을 오르며 선수들과 함께 달린다. 그의 구령소리가 여전히 체육관에 울려 퍼진다.
61년 전 흙바닥에서 시작된 그의 복싱은 이제 한국 스포츠 정신의 상징이 되었다. ‘보병은 잽이고, 곡사포는 훅이다’라던 그의 철학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농부의 손에서 태어난 복싱이, 이제 부여의 자부심이자 대한민국 복싱의 뿌리가 되었다. “복싱은 내 인생의 전부입니다. 하지만 진짜 싸움은 링 위가 아니라, 매일 새벽 다시 일어서는 내 자신과의 싸움이죠.”
임영수 관장! 그의 라운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