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스팟 기획] 백제 건축 기술자 아비지와 황룡사 9층목탑… 예술과 정치, 한 장인의 운명

부여의 한 공방에서 시작된 질문우리는 왜 아비지를 잊고 살았는가 

최근 부여의 공방 아비지를 방문한 자리에서, 나는 한 장인의 이름이 다시 또렷하게 떠올랐다. 그곳에서 들은 설명은 단순히 건축 기술자의 소개를 넘어, 백제의 예술과 공학이 당대 세계적 수준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역사적 재조명이었다. 수많은 백제 장인 중에서도 특히 아비지는 삼국시대 기술의 정수를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부여 사람으로서, 그리고 사비인의 정체성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부여군민으로서, 이 이름은 단순한 역사적 인물이 아니다. 아비지는 백제가 얼마나 뛰어난 문명과 기술을 가진 나라였는지 보여주는 살아 있는 증거이자 우리 문화의 자부심 그 자체였다. 

이 글은 바로 그 순간 느낀 질문에서 출발했다.

왜 우리는 세계적 건축가였던 백제 장인 아비지를 잊고 살았는가? 그리고 그의 기술은 어떤 의미를 남겼는가?”

이를 밝히기 위해 나는 아비지와 황룡사 9층목탑의 역사를 다시 들여다보았다. 

황룡사지 모형도(사진 경주시)

백제 장인이 신라의 심장부로 간 이유

 삼국시대의 역사는 전쟁과 외교, 문화 교류가 복잡하게 얽혀 만들어진 거대한 서사이다. 이 서사 속에서 특히 눈에 띄는 존재가 있다. 바로 백제에서 태어나 신라의 수도 서라벌 한복판에 동아시아 최대의 목탑을 세운 장인, 아비지이다. 백제와 신라는 서로를 견제하던 적대국이었지만, 신라는 국가의 명운을 걸고 추진한 황룡사 9층목탑 건립을 위해 결국 백제 최고의 기술자를 불러들였다. 이러한 사실 자체가 당시 백제가 삼국에서 가장 우수한 건축·공예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음을 증명한다. 

국가적 위기 속에서 탄생한 호국 불탑 

642년 대야성이 백제군에 함락되자 신라는 극심한 국가적 위기에 빠졌다. 선덕여왕의 국정 운영은 흔들리고 민심은 흩어졌다. 이때 신라는 정치적 혼란을 수습하고 국력을 결집하기 위한 방안으로 황룡사 9층목탑 건립이라는 거대한 국가 사업을 선택하였다. 

목탑 건립은 단순한 불사가 아니라 국력이 여전히 굳건하다는 상징을 세우고 부처의 힘으로 외적의 침입을 막겠다는 국운회복 프로젝트였다. 80m에 달하는 동아시아 최대 규모의 이 목탑은 신라 왕권을 회복하고 백성들의 결집을 이끌어내기 위한 정치적 상징 그 자체였다. 

황룡사지 추정 복원도(사진 경북도청)

신라가 선택한 백제의 손아비지 초빙의 배경 

그러나 신라에는 이러한 대형 목조 건축을 완성할 기술력이 충분하지 않았다. 결국 신라는 경쟁국이자 적대국이던 백제에 도움을 요청했고, 백제는 장인 아비지를 신라에 공식적으로 파견했다. 이는 단순히 기술자를 고용한 것이 아니라, 두 나라의 정치적 계산과 외교적 합의가 결합된 고도의 기술 교류였다. 

아비지는 신라에 도착한 뒤 공사의 전 과정을 책임지는 총책임자가 되었고, 그의 손에서 황룡사 9층목탑은 점차 모습을 갖추어 갔다. 이 과정은 백제가 삼국 중 가장 뛰어난 예술·건축 능력을 갖추고 있음을 다시 한번 증명하는 사례였다. 

아비지를 뒤흔든 두 개의 꿈장인의 고뇌와 선택 

그러나 아비지는 작업 과정에서 깊은 내적 갈등에 시달렸다. 삼국유사는 그의 고뇌를 두 개의 상징적 꿈으로 묘사한다. 그는 먼저 백제가 적의 손에 무너지는 꿈을 꾸고, 자신이 신라의 힘을 키워 조국 백제의 몰락을 앞당기는 것은 아닌지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급기야 공사를 포기하고 신라를 떠나려 하지만, 이어지는 또 다른 꿈에서 하늘의 뜻을 느끼고 다시 현장으로 돌아와 작업을 재개한다. 

이 장면은 개인의 정체성과 장인으로서의 사명 사이에서 갈등하는 그의 모습을 통해, 삼국 시대의 긴장과 문화 교류가 어떤 감정적 무게를 동반했는지를 생생히 보여준다. 

비극적 사랑의 전승인간적 고뇌가 더한 서사 

후대 전승은 그의 삶에 비극적 사랑 이야기를 덧입힌다. 아비지가 신라의 건축 책임자 김용춘의 딸 아미 낭자와 사랑에 빠졌다는 설화는, 적대국 사이에서도 인간적 감정과 교감이 존재했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황룡사 구층목탑이 완성되자 아비지는 환희 대신 깊은 죄책감에 사로잡힌다. 자신이 쌓아 올린 탑이 결국 적국의 상징으로 쓰인다는 현실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그는 사비성을 향해 마지막 큰절을 올리고 강물에 몸을 던졌다고 전해진다. 아미 낭자 역시 그의 뒤를 따르며 비극적 서사는 완성된다. 

목탑의 운명과 금동찰주본기가 전한 진실 

아비지가 남긴 황룡사 9층목탑은 이후 약 600년 동안 신라와 고려의 정신적 중심으로 우뚝 섰다. 그러나 1238년 몽골군의 침입으로 큰 화재가 발생하며 목탑은 완전히 소실되었다. 

한동안 전설처럼 여겨졌던 이 목탑의 실체는 1976년 이후 발굴조사를 통해 드러나기 시작했다. 특히 1966, 도굴범에게서 극적으로 회수된 금동찰주본기930여 자의 기록으로 목탑 건립 과정을 상세히 전하며 아비지의 존재와 기술적 배경이 실재했음을 입증했다. 

문화재가 얼마나 도굴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역사적 진실이 얼마나 우연한 계기로 세상에 드러날 수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했다. 

기술과 운명이 교차한 자리에서 

백제 장인 아비지와 황룡사 9층목탑의 역사는 단순한 건축 이야기가 아니다. 이는 삼국 시대의 긴장 속에서 기술과 예술이 어떻게 국경을 넘고, 한 장인의 운명과 국가의 흥망이 어떻게 뒤엉켜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이다. 

부여에서 태어난 백제인의 기술이 신라의 역사를 바꾸었고, 그 기술은 천년의 세월을 넘어 오늘날까지도 울림을 남긴다. 부여인으로서, 그리고 백제의 후손으로서 아비지를 다시 기억한다는 것은 우리의 문화적 뿌리와 자부심을 되찾는 일과 다르지 않다. 

그의 삶은 시대의 경계에 놓인 한 인간의 고뇌를 담고 있지만, 그의 기술은 백제 예술과 공학이 세계적 수준이었음을 증명하며 지금까지도 찬란한 유산으로 남아 있다. 

 

댓글 쓰기

다음 이전